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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역경의 열매] 이에스더 (7) 홀사모의, 홀사모를 위한 선교회를 창립하다
작성자 : 작성일시 : 2015-06-11

이에스더 목사는 항상 기도 가운데 설교를 준비해 성도들에게 영의 양식을 공급하고 있다. 자신이 정리한 설교 파일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 목사.

대구 요나금식기도제단은 이사야 58장에서 금식의 원리를 발견해 시작할 수 있었다.

성경은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한다. 금식을 통한 선물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또 금식 후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계신다.

나는 홀사모가 된 뒤 단식하며 기도할 때가 많았다. 이때 체험한 강한 은혜를 바탕으로 에스더와 요나가 3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밤낮으로 부르짖던 ‘3일의 금식’을 나의 단식기도법으로 정립했다. 이것은 오늘날 내가 요나3일영성원을 운영하는 핵심 골격이 돼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때부터 나는 1∼3일간 단식하며 기도한 후 물과 부드러운 죽으로 3∼7일간 단계적 보호식을 하도록 한다. 이곳서 단식하며 기도하는 분마다 건강의 회복과 문제 해결의 급속한 응답을 경험하게 되면서 요나금식기도제단이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홀사모’는 소천한 교역자, 목사의 홀로 남은 아내를 뜻하는 말로 홀사모선교회란 이름을 지었다. 내가 특허로 등록한 이름이기도 하다. 나 역시 홀사모로 졸지에 아이 넷을 데리고 사택에서 나와 고생했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릿하다.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며 언젠가 홀사모를 돕는 사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드디어 1994년 6월 23일 요나기도제단이 있던 대구 달성군 논공읍 노이동에 200평 규모의 홀사모수양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평생을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내조만 하다 어려움을 당한 홀사모를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형편이 어려우면 생활비를 주고, 매주 화요일 홀사모 사역자 양성 과정을 열었다.

홀사모는 남편이 소천하면 사모가 아니라 집안의 가장이자 어머니로 돌아간다. 재산이 없으면 생계가 막막한 경우가 많았다. 또 목사가 소천한 것에 성도들이 왈가왈부 말을 많이 하는데 이 역시 남겨진 사모에게는 엄청난 상처가 된다. 나는 사모들의 고충을 해결해주고 자녀들이 장학금을 받아 공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홀사모 모임을 매월 정기적으로 가지다 1998년 7월 14일 서울 양재동 횃불회관에서 홀사모 전진대회 및 위로 행사를 열고 공식 명칭을 ‘세계기독교 교역자 홀사모선교회’로 이름을 지었다. 나는 이 사역을 하면서 그 중요성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전국 교회에 보내곤 했는데 외면도 많이 받았지만 수고한다고 격려하며 후원금을 보내주는 목사님도 많았다. 참으로 감사했다.

사역을 하면서 의외로 어려움에 처한 홀사모가 많았다. 도움을 주고자 선교회로 오라고 해도 일부는 차비도 없어 못 온다는 것을 알고는 직접 홀사모를 찾아다니며 기도해주고 생활비도 전달하곤 했다. 또 해외 교회도 순방하며 홀사모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기도 했는데 한동안 해외 교회의 후원이 이 사역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당장 사택을 비우라는 말에 울기만 하던 사모를 찾아 가재도구를 싣고 수양관으로 데려온 경우도 있었다. 홀사모선교회 사역은 단순히 도움을 주는 차원을 넘어 사모들의 잠재됐던 재능을 깨우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나서는 데 동기부여를 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무엇보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낙담해 있던 사모들에게 연수 과정을 통해 사역의 길을 열어드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했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이 사역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